평론 · 윤동주 연작 「부끄러움의 시작」
윤동주 「자화상」 — 우물의 윤리, 바람의 운명
문학평론 · 청람 김왕식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평 — 우물의 윤리, 바람의 운명
윤동주 〈자화상〉을 읽는 일은,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심문하는 방식’을 목격하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끝까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내놓지 않는다. 그는 ‘나’라는 이름을 피하고, 자신을 “한 사나이”로 비껴 세운다. 이 거리두기는 수사가 아니라 윤리다.
우물은 이 시의 핵심 장치다. 우물은 단순히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들여다보는 순간, 인간은 자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윤동주는 우물 속에 ‘사나이’만 넣지 않는다. “달”과 “구름”과 “하늘”과 “파아란 바람”과 “가을”을 함께 담는다. 이는 자기 존재를 세계 전체 앞에 놓아 심문하려는 태도다. 그는 자신을 자연 속에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더 투명해지려 한다.
이 시의 감정은 한 번도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미움, 연민, 다시 미움, 다시 그리움. 반복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윤동주의 가치철학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미움은 자기기만을 경계하는 칼날이고, 가엾음은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는 숨결이다. 그래서 시인은 우물에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떠난다. 그 왕복은 ‘해답을 찾기 위한 이동’이 아니라, ‘해답이 없음을 견디는 이동’이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 시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양심이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마지막 손잡이다.
마지막에 남는 문장은 냉정하다.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미워해도 그대로, 가엾어해도 그대로, 그리워해도 그대로. 윤동주는 자기 성찰의 끝을 화해로 닫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바뀌지 않은 자신’ 앞에 그대로 선다. 이것이 그의 엄격함이며, 동시에 그의 순결함이다. 순결은 깨끗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태도다.
서정주의 〈자화상〉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정주에게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에서 바람은 삶을 할퀸 역경과 시련의 총량이다. 반면 윤동주는 바람을 업적의 언어로 만들지 않는다. 윤동주의 바람은 자기 위안이 아니라, 자기 검열의 차가운 공기다. 그래서 끝내 “나는 이렇게 버텼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아직도 이렇다”를 남긴다. 서정주가 바람을 통해 자기를 세운다면, 윤동주는 자신을 세우는 대신, 자신을 내려다본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나’를 완성하는 시가 아니라 ‘나’를 쉽게 완성하지 않으려는 시다. 자기 확신의 시대에 그는 자기 의심을 남겼고, 자기 변명의 시대에 그는 자기 부끄러움을 남겼다. 우물 속 사나이는 결국 윤동주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미워하고, 불쌍히 여기고,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그대로인 얼굴. 윤동주의 자화상은 그 얼굴을 정직하게 비추는, 시대의 양심 거울이다.
청람 김왕식의 윤동주 연작 평론 「부끄러움의 시작」 중 「자화상」 평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