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허형만 시론
존재의 높낮이를 지우는 언어
문학평론 · 청람 김왕식
여는 말 ― 세계 앞에 머무르는 언어를 위하여
문학을 읽는 일은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에 앞서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다. 특히 시를 읽는 일은 언어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와 마주하는 자세를 스스로 점검하는 데 있다.
이 글은 한 시인을 해석하는 작업이 아니라 시가 열어 놓은 사유의 공간에 함께 머무르는 기록이다. 언어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 세계와 나란히 서기를 선택할 때 문학은 비로소 존재 이해의 깊이를 확보한다.
사물 앞에 머무르는 윤리
허형만 시 세계에서 사물은 해석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먼저 관계의 장을 형성한다. 시인은 사물을 설명하거나 의미화하려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판단을 유보하는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맺으며
이 다섯 작품을 관통하는 허형만 시의 핵심은 ‘세계 앞에 머무르는 언어’에 있다. 그의 시는 세계를 소유하지 않으며, 타자를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낮은 자리에서 오래 바라보고, 몸으로 접촉하며, 관계의 온기를 회복하고, 자연과 나란히 서고, 기억을 공동체로 넓힌다.
언어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 세계와 나란히 서기를 선택할 때, 시는 존재 이해의 깊이를 확보한다. 허형만의 시 세계는 바로 그 선택을 지속해온 기록이다.
청람 김왕식의 평론 「존재의 높낮이를 지우는 언어 ― 허형만 시론」 중 여는 말·본론·대표 시편·맺음말을 실었습니다.